지브리 스튜디오에 리얼리즘을 들고 온 사람
안도 마사시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감독 제의를 처음에 거절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각본과 콘티가 자신의 작품관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안도는 리얼리즘 지향 애니메이터다.
결국 감독직 대신 작화감독으로 참여하되, 레이아웃과 원화 수정에는 미야자키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작업을 시작했다.
지브리의 작화 시스템은 콘티 → 레이아웃 → 원화 → 작화감독 수정 → 감독 최종 수정 순서로 돌아간다.
안도가 원한 것은 이 마지막 단계, 즉 감독의 손이 원화를 다시 고치는 단계를 없애는 것이었다.
미야자키의 손을 타면 캐릭터는 자동으로 '미야자키화'되기 때문이다.
타카노 후미코 스타일이란 무엇인가
안도가 치히로에 적용하려 한 것이 타카노 후미코(高野文子) 스타일이다.

타카노 후미코는 일본의 만화가다.
그의 화풍은 선의 수를 극단적으로 줄이면서도 인간의 몸짓과 체형을 실제처럼 그리는 방식이다.
장식적인 선을 걷어내면 캐릭터는 자연스럽게 덜 예뻐 보인다.
눈이 크지 않고, 얼굴 비율이 실제 아동에 가까워지고, 표정이 과장되지 않는다.
안도는 이 방식을 열 살짜리 치히로에게 적용하려 했다.
실제 열 살 아이처럼 그리겠다는 뜻이다.

지브리의 이전 여주인공들 — 나우시카, 시타, 키키 — 과 비교하면 의도가 뚜렷하다.
그들은 모두 어딘가 이상화된 외형을 갖고 있다.


영상에서 읽히는 것 — 다리와 걸음걸이
안도의 리얼리즘은 얼굴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다.
영화 초반, 치히로의 걸음걸이는 지브리 여주인공의 전형과 다르다.
힘이 없고, 경쾌하지 않고, 다리가 안쪽으로 살짝 굽어 있다.
이것이 안도의 직접 발언으로 확인된 설계 의도인지는 현재 검증되지 않는다.
다만 타카노 후미코 스타일의 핵심이 "인간의 리얼한 라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걸음걸이 묘사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야자키의 개입과 실현의 한계
그런데 안도의 의도는 절반만 실현됐다.
제작이 진행되면서 미야자키가 예정에 없던 레이아웃 수정과 원화 수정을 직접 지시하기 시작했다.
처음 합의한 조건을 어긴 것이다.
치히로의 감정 표현과 성격 변화 묘사가 점차 미야자키 스타일로 되돌아갔다.
안도는 이것을 제작 종료 후 인터뷰에서 직접 밝혔다.
"전체적으로는 미야자키 작품의 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그의 자평이다.
제작 기간 동안 안도는 극도의 과로와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고 한다.
의견 충돌을 넘어 육체적 한계까지 몰린 상황이었다.
퇴사와 그 이후
안도는 이 작품을 끝으로 지브리를 퇴사했다.
단순히 이 작품에 대한 불만 때문이 아니다.
미야자키라는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는 자신의 리얼리즘을 온전히 구현할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퇴사 후 안도는 곤 사토시 감독과 작업하면서 달라진다.
《파프리카》(2006), 《망상대리인》에서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감독을 맡으며 자신이 추구한 리얼리즘 미학을 완전히 구현한다.
곤 사토시는 안도의 시안을 보고 "천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미야자키 시스템이 막았던 것을 곤 사토시가 열어준 셈이다.
결과물에서 무엇이 남았는가
완성된 치히로를 보면 타협의 흔적이 있다.
눈은 지브리 기준으로 작고, 표정은 지나치게 과장되지 않는다.
특히 영화 초반, 터널을 지나기 전의 치히로는 뾰루퉁하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일관한다.
반면 후반부로 갈수록 치히로의 얼굴은 점점 지브리 고유의 미적 질서로 수렴한다.
이것이 미야자키 개입의 결과인지, 서사적 성장의 표현인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안도가 치히로를 "예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타카노 후미코 식 절제된 선 처리와 이상화된 비율의 회피다.
그 결과는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최종 치히로는 두 미학이 충돌한 결과물이다.
그 충돌이 치히로를 지브리 여주인공 중 가장 이질적인 외형으로 남겨놓는다.
참고 출처
- 안도 마사시 나무위키 항목 (제작 후 인터뷰 내용 정리)
- 안도 마사시 × 카타부치 스나오 2018년 인터뷰 (디시인사이드 애갤러스 번역본)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나무위키 제작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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