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가 스크린에서 숨긴 것들/지브리 스튜디오

극장에서 망한 영화가 지브리 1위가 된 사연 — 라퓨타 재평가의 경로

by blade 2026. 4. 8.

천공의 성 라퓨타 (1986)


1986년 8월 2일, 일본 103개 극장에서 개봉한 천공의 성 라퓨타의 배급 수입은 5억 8,300만 엔이었다. 2년 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기록한 7억 4,000만 엔에 못 미치는 수치다. 당시 일본 영화 업계는 배급사가 받는 '배급 수입'을 공식 지표로 사용했고, 흥행 수입(총 티켓 판매액)으로 환산하면 라퓨타는 11억 6천만 엔, 나우시카는 14억 8천만 엔으로 추산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결과에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2009년 12월 잡지 「컷」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개봉 당시에는 관객이 전혀 없었다. 한참 지나서야 '라퓨타가 좋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 작품이 재평가된 경로는 단계적이다.

첫 번째 경로는 가정용 비디오 대여 시장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가정용 비디오 재생기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됐고, 동네 비디오 대여점을 통해 극장에서 놓친 작품을 집에서 볼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라퓨타는 이 경로를 통한 반복 시청과 입소문으로 조용히 퍼져나갔다. 이후 누적된 판매(VHS·DVD) 실적을 보면, 2003년까지 일본에서만 161만 2천 장을 넘겼고, 평균 판매가 4,600엔 기준으로 약 74억 엔의 매출이다. 배급 수입의 약 13배에 달하는 수치다.

두 번째 경로는 TV 방영이다. 지브리 작품들의 지상파 방영은 반복적으로 이뤄졌고, 라퓨타 역시 재방영 때마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 결말부 '바루스' 장면은 방영될 때마다 온라인 화제를 일으키는 고정 이벤트가 됐다. 2013년 8월 방영 당시, 해당 장면이 나온 순간 트위터의 초당 트윗 수는 14만 3,199건으로 당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직전 기록이었던 새해 '새해 인사' 트윗 3만 3,388건의 네 배가 넘는 수치다.

세 번째 경로는 지브리 브랜드의 성장이다. 1988년 이웃집 토토로, 1997년 원령공주, 2001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차례로 흥행하면서 지브리는 하나의 보증 브랜드가 됐다. 이 흐름 속에서 관객들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실질적인 창립작으로 거슬러 올라갔고, 라퓨타는 그 출발점으로 다시 주목받았다. (나우시카는 지브리 스튜디오 설립 이전이라서 톱크래프트에서 제작됐다.)

결과적으로 라퓨타는 2021년 기준 극장 수익·가정용 영상·음악 등 전체 매출 합산이 약 1억 5,700만 달러에 달하는 작품이 됐다. 2020년 넷라보 인기 투표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야자키 감독 작품' 1위에 오른 것도 이 맥락과 맞닿아 있다.

극장 성적만으로는 실패작이었던 영화가, 복수의 유통 경로를 거치며 지브리 대표작 중 하나가 됐다. 이 사례는 영화 흥행의 기준이 극장 개봉 주에만 있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