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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스크린에서 숨긴 것들/지브리 스튜디오

라퓨타의 파즈와 미래소년 코난의 코난 — 미야자키가 같은 소년을 반복해서 그리는 이유

by blade 2026. 4. 8.

미야자키 하야오는 같은 소년을 계속 그린다. 설정만 바꿔서.

코난은 대변동 이후 폐허가 된 섬에서 할아버지와 단둘이 산다. 지구를 탈출하려다 불시착한 우주선 생존자들의 후손이며, 대변동이라는 구세대의 죄를 짊어지지 않은 채 태어난 아이다. 그 섬에서 태어난 첫 번째 인류이기도 하다.

미래소년 코난


파즈는 다르다. 슬랙 계곡 광산촌의 노동자들 틈에서 기계 견습공으로 제 몫의 밥벌이를 하는 소년이다. 부모는 없지만 공동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코난이 문명 바깥에 완전히 고립된 존재라면, 파즈는 그 안에 살면서 바깥을 꿈꾼다. 

천공의 성 라퓨타

캐릭터 구조는 겹친다. 조직이나 권력에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위치, 소녀를 보호하려는 동기, 그리고 '아버지 세대의 꿈'을 이어받는 구도. 코난은 대변동 이전 문명의 죄를 물려받지 않은, 새로운 세대의 원점으로 기능한다. 파즈는 라퓨타를 믿다 죽은 아버지의 오명을 풀기 위해 움직인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사진 한 장뿐이다. 비행기는 파즈 본인이 설계하고 조립 중인 것으로—새의 날갯짓을 본뜬 구조다—아버지의 유품이 아니라 파즈 스스로의 의지를 보여주는 물건이다.

미야자키 본인이 이 캐릭터 유형에 대한 감정적 기원을 밝힌 적 있다. 어린 시절 체력이 약했던 자신이 강한 주인공을 보며 대리 만족을 느꼈다고 했고, 그 경험이 코난 같은 초인적 신체 능력 소년의 원점이 됐다고 한다. 파즈의 이름 자체도 미야자키가 대학 시절 인형극 주인공으로 구상했던 이름에서 왔다. 파즈는 코난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기보다, 미야자키 안에 오래전부터 존재하던 원형 캐릭터가 다른 배경에 얹힌 것이다.

차이도 뚜렷하다. 코난은 만화적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수준의 초인이다. 발가락 힘만으로 거대한 문을 열거나 벽에 매달리고, 수십 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리고도 멀쩡히 달린다.

미래소년 코난

파즈는 훨씬 현실적이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라 일당이나 시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소년이 현실적으로 조정된 만큼, 소녀의 역할은 커졌다. 라나가 주로 보호받는 위치에 머물렀다면, 시타는 직접 주문을 외워 라퓨타를 봉인한다.

천공의 성 라퓨타

미야자키가 1978년에서 1986년 사이에 무언가 조정을 한 셈인데, 방향은 명확하다. 소년의 초인성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관계와 역할 분담을 넣는 쪽으로.

이 두 소년이 반복되는 건 미야자키가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다. 문명 바깥 출신의 순수한 소년이어야, 기계 문명이나 권력 구조와 충돌할 때 그 부조리함이 두드러진다. 코난이 인더스트리아와 부딪히고, 파즈가 군부와 부딪히는 구도는 동일한 서사 뼈대다. 소년의 맑음이 클수록 그 반대편의 탁함이 선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