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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스크린에서 숨긴 것들/지브리 스튜디오

원령공주 - 아시타카는 카야의 선물을 산에게 줬다 — 감독은 이것을 배신으로 보는가

by blade 2026. 4. 6.

카야는 아시타카가 마을을 떠나던 밤, 자신이 가장 아끼던 흑요석 단검을 그에게 건넨다.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겠다"는 말과 함께. 아시타카도 "나도 언제나 너를 생각하겠다"고 답한다. 그런데 영화 중반, 아시타카는 그 단검을 산에게 넘긴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다. 카야의 단검은 약혼의 증표다. DVD 팸플릿에 카야는 "아시타카의 약혼자"로 명시되어 있고, 미야자키 감독도 2001년 발매된 DVD 부록 영상에서 카야를 "일족이 선택한 약혼자"라고 직접 언급했다. 즉 아시타카가 산에게 건넨 물건은 연애 선물이 아니라, 파혼당한 여자의 혼인 증표다.

감독은 이걸 배신으로 볼까? 공식 발언은 명확하다. "아시타카는 산을 선택했으니 카야와 아시타카가 맺어질 일은 절대 없다." 감독이 직접 못 박은 말이다. 이 발언은 아시타카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심판한 것이 아니라, 서사 구조상의 결론을 확인한 것이다.

배신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아시타카의 의도보다 카야의 처지에 있다. 카야는 아시타카가 저주를 받아 추방되는 시점에 사실상 파혼 상태가 됐다. 금기를 깨고 야밤에 배웅을 나온 것도, 단검을 건넨 것도, 자신이 먼저 선을 넘은 행위다. 공동체의 규범 안에서 카야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시타카의 행동은 도덕적으로 깨끗한가? 그렇지도 않다. 단검을 산에게 줄 때 아시타카는 카야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 물건의 출처를 지우고 넘긴 셈이다. 감독이 이 장면에 대해 배신이라고 단정하지 않은 건, 아시타카가 옳아서가 아니라 이 영화가 그런 식의 도덕 심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일본판에서 카야와 산의 성우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 캐스팅은 제작진의 의도적 선택이다. 아시타카가 카야의 단검을 산에게 건네는 장면은 두 인물이 서로 다른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시타카에게 겹쳐 보이는 구조를 내포한다. 감독은 배신의 서사 대신, 대체와 전이라는 심리적 구조를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