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 (1997)
제작 중에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가 지브리 직원들과 나라현으로 단체 여행을 갔다. 그 자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나라 공원의 꽃사슴 무리를 보다가 갑자기 "이거다!"라고 외쳤고, 그 자리에서 꽃사슴을 참고 삼아 시시가미 캐릭터를 설계했다고 스즈키가 직접 밝힌 바 있다.
이 일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즉흥성'이다. 시시가미는 원령공주의 서사 축 전체를 떠받치는 존재다. 생명을 주고 빼앗는 최고신이며, 영화 후반의 재앙 시퀀스를 촉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런 캐릭터의 기본 조형이 사전 기획이 아니라 야외 현장에서 결정됐다는 건 단순한 뒷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완성된 시시가미의 외형을 보면 이 즉흥성이 어디에 남아있는지 보인다. 영화 홍보 카피에도 명시된 대로, 시시가미는 "사람의 얼굴과 짐승의 몸, 나무의 뿔"을 가진 존재다. 여기서 몸통과 걸음걸이는 실제 사슴에 가깝다. 크기도 일반 사슴 수준이다. 반면 얼굴과 뿔은 실제 사슴과 다르다. 나라 공원의 꽃사슴이 가진 날씬한 몸과 온순해 보이는 실루엣은 그대로 가져왔지만, 얼굴에 인간의 형상을 덮어씌우고 뿔은 나뭇가지 형태로 변형했다.

이 구조가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시시가미는 영화 안에서 '위화감'을 만드는 존재로 기능한다. 몸은 친숙한 사슴인데 얼굴이 인간을 닮아 있다. 이 불일치가 캐릭터에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을 부여한다. 나라 꽃사슴이 기반이 됐기 때문에 몸통은 사실적이고 생태적인 반면, 얼굴과 뿔에서 신화적 과장이 적용된 것이다. 즉흥 결정이 몸통의 사실성을 고정시키고, 이후 설계 작업이 그 위에 신화적 요소를 쌓는 방식으로 진행된 셈이다.
또 하나의 흔적은 스케일이다. 영화 속 다른 동물신들—모로, 옷코토누시—은 압도적인 크기로 신격을 표현한다. 반면 시시가미는 평범한 사슴 크기다. 이 설정이 나라 공원 꽃사슴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크기를 늘리지 않은 것이 의도적인 선택이었는지 아니면 원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결과인지 명확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결과적으로 시시가미는 물리적 압도감 대신 초월성으로 신격을 표현하는 방향이 됐다.

미야자키가 "이거다"라고 외친 순간은 아마도 조형적 해결책이 눈앞에 있다는 직관이었을 것이다. 나라 꽃사슴의 실루엣이 그가 설계하려던 신의 몸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그 위에 얹힌 설계—얼굴의 인간화, 나뭇가지 뿔, 소형 스케일 유지—는 모두 일관된 방향으로 정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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