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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스크린에서 숨긴 것들/지브리 스튜디오

마녀 배달부 키키의 그 그림, 사실 중학생들이 그렸다

by blade 2026. 4. 12.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 (1989) |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결론부터

우르술라의 그림이 샤갈 화풍처럼 보이는 건 미야자키가 샤갈을 모방해서가 아니다. 원화(原畵) 자체가 이미 그런 성질을 가진 작품이었다. 미야자키는 그 작품에서 느낀 '생명력'을 키키의 슬럼프 장면에 심어 넣었다. 영화는 이 그림 한 장면을 통해, 키키가 잃어버린 것이 단순한 '비행 능력'이 아님을 시각적으로 확정한다.


그림의 실제 출처: 미나토 중학교 양호학급 판화

이것이 이 장면의 출발점이다.

영화 속 우르술라의 그림은 실존하는 판화 작품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원작은 아오모리 현 하치노헤시립 미나토중학교(八戸市立湊中学校) 양호학급 학생 13~14명이 사카모토 쿠지로(坂本小九郎) 교사의 지도 아래 공동 제작한 지판화(紙版画) 연작 〈니지노 우에를 토부 후네(虹の上をとぶ船) 총집편 II〉(1976) 중 한 점으로, 제목은 〈별하늘을 천마와 소와 새가 날아가다(天馬と牛と鳥が夜空をかけていく)〉다.

https://x.com/MiyoSato2/status/1192787455704911872/photo/1

 

X의 Miyo Sato님(@MiyoSato2)

「天馬と牛と鳥が夜空をかけていく」という題の版画は、魔女の宅急便でキキが仲良しになる画家の女の子ウルスラの描いた油絵のモデルになっているそうです。 魔女宅でこの絵を知って以

x.com

 

지판화는 종이를 오려 붙여 만드는 판화 기법이다. 조각칼 대신 손으로 형태를 자르고 구성하기 때문에, 완성된 이미지는 정교함보다 투박하고 강렬한 질감을 갖는다. 규칙보다 감각이 앞서는 방식이다. 우르술라가 숲속 오두막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자유로운 예술가로 묘사된다는 점과 잘 어울린다.

미야자키가 이 작품과 연을 맺게 된 경위도 명확하다. 미야자키의 장인인 오타 코지(大田耕士)가 일본교육판화협회 위원장이자 판화 교육 실천가였고, 사카모토 교사와도 교류가 있었다. 그 인연으로 미야자키가 이 판화를 접했고, 감명을 받아 정식으로 허락을 얻어 영화에 삽입했다. 배경 담당 오가 가즈오(男鹿和雄)가 가필·아레인지해 완성된 것이 영화 속 장면이다. 현재 원작 판화는 하치노헤시 미술관과 아오모리 현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즉, 우르술라가 샤갈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만들어 낸 판화가 원래부터 샤갈의 작품 세계와 유사한 성질 — 현실을 초월한 이미지, 공중을 나는 존재, 동물과 인간의 공존 — 을 갖고 있었다.


장면의 위치와 맥락

이 그림은 영화 후반부, 키키가 마법을 잃은 직후 우르술라의 오두막을 찾아가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빗자루가 부러지고 지지의 말도 들리지 않게 된 키키는 스스로를 "쓸모없어졌다"고 느끼는 상태다. 우르술라는 바로 그 고뇌에 빠진 키키의 얼굴을 보고 영감이 떠올랐다고 말하며 그림을 완성한다.

그림의 구성은 이렇다. 우르술라의 오두막 위 짙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키키가 '빗자루' 대신 '백마(天馬·페가수스)'를 타고 날아간다. 옆에는 '뿔 달린 소'가 함께 하늘을 난다. 숲에서 키키를 공격했던 까마귀들은 이제 에스코트하듯 주위를 함께 날고 있다.


왜 샤갈 화풍처럼 보이는가

샤갈의 그림 세계는 '기억의 현실주의'로 설명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기억과 감정이 재구성된 이미지를 화면에 올린다. 하늘을 떠다니는 인물, 공중에 뜬 동물, 비현실적인 색채가 그 결과물이다.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장 카수는 샤갈을 "초현실주의자가 아닌 현실주의자"로 재정의했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기억 속의 현실을 그리기 때문이다.

샤갈,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 1911)

미나토중학교 학생들의 판화도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별하늘, 공중을 나는 천마와 소, 새. 체계적인 회화 교육보다 앞선, 감각이 먼저 나온 이미지다. 지판화 특유의 투박한 질감은 그 직관성을 더 강하게 만든다. 미야자키가 이 판화에서 느낀 '생명력'은 바로 그 지점이었을 것이다.


빗자루가 '백마(天馬)'가 된 이유

빗자루는 키키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물건이다. 원작 설정상 키키는 자신이 직접 만든 새 빗자루를 타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 코키리의 권유로 검증된 낡은 빗자루를 물려받아 떠난다. 빗자루를 부러뜨리는 장면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보호막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판화 원작에도 천마(페가수스)가 등장한다. 우르술라는 고뇌하는 키키의 얼굴을 보고 이 판화의 구도 위에 키키를 겹쳐 넣었다. 물려받은 빗자루에 의존하던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강력한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그린 것이다. 빗자루 대신 페가수스를 탄다는 것은, 물려받은 마법에서 스스로 개척하는 마법으로의 전이를 의미한다. 그 전이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그림이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하다.


지지가 '뿔 달린 소'가 된 이유

원화에는 처음부터 소가 등장한다. 우르술라가 지지를 보고 소로 '변환'한 것이 아니라, 원화의 구도 속에 지지의 존재를 소로 대입시킨 것이다.

이 치환은 두 가지 레이어에서 읽힌다. 하나는 샤갈의 맥락이다. 샤갈의 대표작 〈나와 마을(Moi et le village)〉(1911)에서 소는 고향과의 유대, 뿌리와의 연결을 의미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샤갈은 이 그림에 대해 "파리에 있는 나에게 고향 마을이 암소의 얼굴로 떠오른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함께 온 유일한 존재인 지지가 소로 그려진 것은, 지지가 키키에게 갖는 상징적 무게를 정확히 담아낸다.

다른 하나는 영화 내적 맥락이다. 지지는 지금 말을 잃은 상태다. 키키가 지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내면 — 직관, 본능, 고향과 이어진 감각 — 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말(언어)을 잃은 대신, 뿔 달린 소처럼 묵직한 실존으로 곁에 있다. 지지는 가볍게 떠드는 동물에서 키키의 삶을 지탱하는 무게 있는 동반자로 격상된다. 뿔은 그 무게에 힘을 더한다.


짙은 푸른색의 의미

그림의 배경색은 짙은 파랑이다. 서양 회화에서 짙은 청색은 밤, 죽음, 혹은 신성을 나타낸다. 샤갈도 푸른색을 신성한 색으로 인식했다. 두 의미가 동시에 작동한다. 키키는 지금 '인생의 밤'에 있고, 그 어두움 속에서 하늘을 날고 있다. 판화 원화의 제목 자체가 '별하늘을 날아가다'다. 그 밤하늘이 영화 속 그림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까마귀의 전환

영화 초반, 키키가 숲속에서 인형을 찾을 때 까마귀들이 둥지를 지키기 위해 공격한다. 그때는 적대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우르술라의 그림 속에서 같은 까마귀들은 키키를 호위하듯 함께 날고 있다. 자연 — 처음에 키키를 거부했던 환경 — 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그림이 미리 제시하는 구조다. 우르술라의 그림은 지금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키키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미지로 제시한다.


정리

이 장면의 핵심은 미야자키가 샤갈 화풍을 '흉내 낸'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만들어 낸 판화 — 이미 그 성질을 가진 작품 — 를 가져와 키키의 이야기 위에 겹쳐 넣었다는 점이다. 종이를 오려 붙이는 지판화 특유의 투박한 생명력이 샤갈의 '기억의 현실주의'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고, 그것이 마법을 잃은 키키의 내면 상태와 맞아떨어졌다.

빗자루는 페가수스가 되어 물려받은 마법에서 스스로 개척하는 마법으로의 전이를 예고하고, 지지는 뿔 달린 소로 말 없는 묵직한 동반자로 격상되며, 적이었던 까마귀들은 호위자로 전환된다. 짙은 푸른 밤하늘은 그 모든 것을 감싸는 배경이다. 이 그림은 키키에게 직접적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대신 키키가 자기 자신을 보는 방식을 바꿔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