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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스크린에서 숨긴 것들/지브리 스튜디오

지브리 감독이기 이전에 덕후였던 작가 — 하야오의 만화 연대기

by blade 2026. 4. 13.

미야자키 하야오 하면 지브리, 아카데미, 나우시카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그는 1960년대 말부터 직접 만화를 연재한 작가이기도 하다. 영화 커리어와 나란히, 혹은 그 이전부터 쌓아온 만화 작업을 연대기 순으로 훑으면 그의 세계관이 어디서 왔는지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1969–1970 | 필명 뒤에 숨은 시작

하야오는 '아키츠 사부로'라는 필명으로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을 연재했다. 장편 극화 형식으로, 황폐한 대지와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렸다. 훗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슈나의 여행」에서 반복되는 황무지·방랑자 구도의 원형이 여기서 확인된다. 같은 시기 「장화 신은 고양이」의 동명 애니메이션 홍보용 만화화 작업도 진행했는데, 이쪽은 상업적 의뢰 성격이 강했다.

http://blog.naver.com/k2zeby/10028119731

 

장화 신은 고양이(長靴をはいた猫) 1969

극장 아니메 리스트 18         장화 신은 고양이 長靴をはいた猫  1969.3.18 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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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94 | 나우시카, 영화보다 긴 이야기

아니메쥬에 연재를 시작한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1984년 영화가 개봉할 때 2권 중반까지밖에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즉, 영화는 원작 만화의 초반부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이후 연재는 휴재와 재개를 반복하며 1994년에야 전 7권으로 완결됐다. 만화판의 결말은 영화와 전혀 다르다. 세계의 오염 구조에 대한 해석, 나우시카가 최종적으로 내리는 선택, 인류 문명에 대한 시각 모두 영화보다 훨씬 비관적이고 복잡하다. 영화만 본 사람이라면 만화 완결편은 사실상 다른 작품처럼 읽힌다.

https://namu.wiki/w/%EB%B0%94%EB%9E%8C%EA%B3%84%EA%B3%A1%EC%9D%98%20%EB%82%98%EC%9A%B0%EC%8B%9C%EC%B9%B4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일본 의 판타지 만화 . 작가는 미야자키 하야오 . 일반적으로 애니메이션이 더 유명하지만, 원작은 미야자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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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슈나의 여행 — 야쿠르라는 연결고리

1983년에 도쿠마 서점에서 출간된 「슈나의 여행」은 연재작이 아니다. 올 컬러 그림 소설(에모노가타리) 형식으로 처음부터 단권으로 기획됐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슈나가 타고 다니는 동물 '야쿠르'가 등장한다. 같은 이름의 동물이 1997년 「모노노케 히메」에서 아시타카의 탈것으로 다시 등장한다. 서쪽으로 향하는 여정이라는 구도도 두 작품이 공유한다. 하야오가 직접 동일 캐릭터임을 명시한 발언은 확인되지 않지만, 이름과 설정의 유사성은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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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의 여행 | 미야자키 하야오 - 교보문고

슈나의 여행 | 오래된 골짜기에 위치한 가난하고 작은 왕국의 왕자 슈나는, 어느 날 찾아온 죽어 가는 이방인 노인으로부터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는 황금빛 씨앗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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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 모노노케 히메 원안 이미지 보드

1997년 영화 「모노노케 히메」가 있기 17년 전, 하야오는 같은 제목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구상했다. 1980년 원안의 설정은 이렇다. 토토로처럼 생긴 요괴 '모노노케'가 자신을 살려준 무사의 딸을 데려간다. '히메'는 공주가 아니라 무가 집안의 셋째 딸(산방메 무스메)을 높여 부르는 말이었다. 하야오는 이 원안을 바탕으로 이미지 보드 작업까지 진행했으나 영상화는 하지 않았다. 이미지 보드는 이후 단행본으로 출판됐다. 1997년 영화의 여주인공 이름 '산(山)'은 이 원안의 셋째 딸 설정에서 온 것으로, 원안은 뒤집혔지만 이름은 그대로 남았다.

https://ghiblicon.blogspot.com/2008/03/mononoke-hime-1980-original-miyazaki.html

 

Mononoke Hime (1980) - The Original Miyazaki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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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992 | 잡상노트 — 영화 바깥의 하야오

하야오는 모델 그래픽스에 밀리터리·메카닉을 주제로 한 단편들을 연재했다. 독자 대상은 지브리 팬이 아닌 모형·병기 마니아였다. 이 연재분들은 1992년 3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잡상노트」라는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됐다. 수록 단편은 총 13편으로, 1차대전 독일 폭격기, 남북전쟁 철갑선, 인도양 함상 뇌격기 등 에피소드 대부분이 실제 병기와 전투를 소재로 한다. 그 중 「비행정 시대」는 모델 그래픽스에 독립 연재된 작품으로, 1992년 영화 「붉은 돼지」의 직접적인 토대가 됐다.

https://www.youtube.com/watch?v=1K-oghALa4o

 

「붉은 돼지」의 주인공 포르코 로쏘는 스스로를 돼지로 만든 인물이다. 하야오는 1992년 로드쇼 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파시즘에 저항하지 못하는 중년 남자는 돼지가 되어도 싸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전쟁 기계를 사랑하면서도 그 파괴성을 외면할 수 없는 인물 — 그 자화상이 돼지라는 형태로 나왔다. 같은 지면에서 1990년에는 「진흙투성이의 호랑이」를 연재했는데, 실존 전차병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을 돼지 캐릭터로 만화화한 작품이다. 여기서도 주인공은 돼지다.

1998–1999, 2015 | 끝까지 이어진 밀리터리 만화

잡상노트 계열은 이후로도 이어진다. 1998–1999년에는 독소전쟁 에이스 전차병을 다룬 「한스 휘트만」을 연재했다.

그리고 2015년, 감독 은퇴를 선언(이후 번복)한 뒤에 모델 그래픽스에 「철포 사무라이」를 발표했다.

대형 스튜디오와 거대 자본이 투입되는 영화 제작에서 물러난 자리에서 그가 선택한 것은 결국 소규모 지면의 만화였다. 영화 제작과 무관하게, 그리고 대중적 기대와도 무관하게 지속된 작업이라는 점에서 이 계열은 하야오의 취향이 가장 여과 없이 드러나는 텍스트다.


정리

하야오의 만화 작업은 크게 세 갈래다. 첫째, 영화의 원천이 된 것들 — 나우시카 만화판, 비행정 시대, 슈나의 여행. 둘째, 영화와 무관하게 지속된 밀리터리 단편 계열 — 잡상노트, 진흙투성이의 호랑이, 한스 휘트만, 철포 사무라이. 셋째, 1960년대 말의 초기 극화 작업 — 사막의 백성. 이 세 갈래를 함께 놓고 보면, 영화에서 보이는 자연·비행·전쟁에 대한 태도가 어떤 경로로 형성됐는지 윤곽이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