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가 스크린에서 숨긴 것들/지브리 스튜디오

모로와 옷코토누시는 전 연인이었다 — 설정 하나가 장면 전체를 바꾼다

by blade 2026. 4. 1.

모로의 마지막 힘은 에보시가 아니라 산을 향했다. 그 이유는 필름 위에 없다. 설정 안에 있다.


성우가 먼저 읽어냈다

지브리 공식 자료와 잡지 『브루투스』에 실린 성우 미와 아키히로의 인터뷰에 따르면, 더빙 현장에서 모로를 연기하던 미와가 옷코토누시를 향한 모로의 태도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다. "둘이 옛날에 연인 사이였나요?" 미야자키는 "맞습니다. 좋은 관계였습니다(いい仲でした)"라고 답했다. 약 200년 전에 헤어진 관계라는 설정이 이렇게 확정됐다. 시나리오에 처음부터 박혀 있던 설정이 아니라, 성우가 캐릭터에서 먼저 읽어내고 감독이 동의하며 굳어진 뒷이야기다.


두 감정이 겹치는 장면

미야자키는 모로의 마지막 장면에 두 감정이 동시에 작동한다고 밝혔다. 산을 향한 모성애, 그리고 폭주하는 옷코토누시를 향한 전 연인으로서의 감정. 모성애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행동 선택이 이 설정 하나로 맥락이 생긴다.


설정이 빠지면 장면이 납작해진다

이 설정을 모르고 보면 모로의 행동은 모성애 하나로 정리된다. 틀린 해석은 아니다. 하지만 절반이다. 모로는 옷코토누시를 향해 "내 딸을 내놔라"고 외친다. 대사만 보면 모성애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상대가 200년 전 헤어진 전 연인이라는 걸 알고 나면, 같은 대사가 다르게 들린다. 레이어 하나가 추가된다.

미야자키는 이 관계를 필름 안에 풀어놓지 않았다. 대사도 없고, 회상도 없고, 암시하는 컷도 없다. 관객이 몰라도 이야기는 굴러간다. 그러나 알고 나면 그 대사의 무게가 달라진다. 모성애의 언어로 말하면서, 200년 전 헤어진 전남친에게 건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옷코토누시가 재앙신으로 변하기 전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오래 남는다

원령공주는 설명하지 않는 영화다. 시시가미의 정체도, 에보시의 과거도, 숲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도 답을 주지 않는다. 모로와 옷코토누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야오 감독은 참 불친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