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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 치킨 게임의 시대에서 램 쇼티지의 시대로

by blade 2026. 6. 13.

치킨 게임의 시대에서 램 쇼티지의 시대로

왜 지금 옛날 이야기를 꺼내는가

요즘 PC 부품 가격을 보면 램값이 미친 듯이 오른다. 2025년 9월 이전과 비교하면 DDR4, DDR5 가격이 4배 넘게 뛰었다. 퇴역한 줄 알았던 DDR3까지 다시 가격이 오른다. 램을 금 대신 화폐로 써도 되겠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그런데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반도체 회사들은 정반대 고민을 했다. 만들면 만들수록 가격이 떨어져서 회사가 망하던 시절이 있었다. 같은 메모리 반도체인데 왜 그때는 가격이 바닥을 모르고 떨어졌고, 지금은 천장을 모르고 오르는가. 이걸 이해하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가 더 또렷하게 보인다.

이 글은 두 개의 레이어로 나눠 본다. 하나는 과거의 '치킨 게임' 레이어다. 다른 하나는 현재의 '램 쇼티지' 레이어다. 둘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원리의 앞면과 뒷면이다.


1부. 과거 — 만들수록 망하던 치킨 게임의 시대

1990년대: PC 붐과 한국의 도약

윈도우 95가 나오면서 전 세계에 PC 열풍이 불었다. PC가 팔리려면 메모리 반도체가 필요했고, 그래서 D램 수요가 폭발했다. 마침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기업의 가격 경쟁력이 약해진 상황이었다. 한국 기업들은 이 틈을 노려 막대한 빚을 내서 공장을 늘렸다.

결과는 좋았다. 1995년까지 D램 가격이 치솟았고,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15~20%를 책임지는 기둥이 됐다.

1996~1997년: 공급 과잉과 IMF

문제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너도나도 공장을 늘리니 1996년부터 D램이 남아돌기 시작했다. 가격은 폭락했다. 여기에 재벌들의 무리한 확장이 겹치면서 한국 경제 전체가 부실해졌고, 결국 IMF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이후 김대중 정부 주도로 대대적인 구조 조정이 진행됐다. 반도체 쪽에서는 현대전자와 LG반도체가 합쳐졌고, 경영권은 현대전자가 가져갔다. 합병한 현대전자는 막대한 부채에 시달렸지만, 긴 구조 조정 끝에 오늘날의 SK하이닉스로 살아남았다.

2000년대 중반~2008년: 제2차 치킨 게임

한숨 돌릴 만하니 이번엔 대만이 도전장을 냈다. 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기업들이 공장을 마구 늘리며 또다시 공급 과잉을 만들었다. 모두가 원가 이하로 팔며 버티는 진짜 '치킨 게임'이 시작됐다.

승부를 가른 건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였다. 금융 위기로 IT 수요가 뚝 끊기자, 원가 이하 출혈 경쟁을 견디지 못한 회사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독일의 키몬다가 파산했고, 대만 기업들도 기술 자립 능력을 잃으며 주도권을 놓쳤다.

이 피 튀기는 경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의 마이크론이다. 지금 메모리 시장을 사실상 세 회사가 나눠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치킨 게임의 핵심 원리

정리하면 이렇다. 메모리는 누가 만들든 성능이 비슷한 '범용 제품'에 가깝다. 그래서 차별화가 어렵고, 결국 가격으로만 경쟁한다. 호황이 오면 모두 공장을 늘리고, 그 결과 공급 과잉이 와서 가격이 폭락한다. 약한 회사가 망할 때까지 출혈 경쟁이 이어진다. 이게 치킨 게임이다.

핵심은 공급은 늘리기 쉬운데 수요는 들쭉날쭉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항상 공급이 수요를 앞질렀고, 가격은 떨어졌다.


2부. 현재 — 만들 수가 없어서 오르는 램 쇼티지의 시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지금은 정반대다. 가격이 미친 듯이 오른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2026년 1분기 범용 D램 계약가격이 직전 분기 대비 처음엔 55~60% 오를 거라 봤다가, 전망을 90~95% 급등으로 올려 잡았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026년 1분기 글로벌 D램 매출은 직전 분기 대비 80% 급증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버용 DDR5 64GB 모듈 가격을 보면 더 실감난다. 2025년 3분기에 255달러였던 게 4분기에 450달러로 뛰었고, 2026년 3월에는 700달러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반년 만에 거의 3배다.

왜 이번엔 가격이 오르는가

원인은 한마디로 AI다. 과거와 결정적으로 달라진 점이 여기에 있다.

첫째, 수요가 폭발했다. AI 데이터센터가 무섭게 늘고 있다. AI 학습과 추론에는 엄청난 메모리가 들어간다. 미국 클라우드 기업들은 2025년 하반기부터 2~3년치 물량을 미리 계약으로 묶어버렸다. 2026년분 HBM과 상당량의 서버 D램, SSD가 이미 '예약 완료' 상태라는 분석이 나온다.

둘째, 공급을 마음대로 늘릴 수가 없다. 이게 핵심이다. 메모리 3사(삼성, SK하이닉스, 마이크론)는 한정된 생산 능력을 고부가가치 제품인 HBM과 서버 D램에 몰아주고 있다. HBM은 칩을 위로 쌓는 복잡한 공정이 필요해서 같은 웨이퍼로 만들 수 있는 양이 범용 D램보다 적다. 그래서 HBM을 많이 만들수록 일반 D램 생산 여력은 더 크게 줄어든다.

거기에 과거의 트라우마도 작동한다. 치킨 게임에서 살아남은 세 회사는 공장을 무작정 늘리지 않는다. 보수적인 투자 기조를 유지한다. 다시는 공급 과잉으로 제 발등을 찍지 않겠다는 학습 효과다.

특히 SK하이닉스의 변신이 상징적이다. 과거 현대전자 시절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회사가 지금은 쇼티지 시대의 주인공이 됐다. 비결은 HBM 주도권이다. SK하이닉스는 일찌감치 HBM에 집중해 엔비디아와 강력한 파트너십을 맺었고, AI 붐의 한복판에서 가장 큰 수혜를 누리고 있다. 치킨 게임의 상처를 딛고 기술 격차로 승부를 본 셈이다.

가격 상승이 번지는 순서

이번 가격 상승은 한 곳에서 끝나지 않고 차례차례 번진다. 서버 D램 → 모바일 D램 → HBM 순서로 올라간다. 고마진 서버용 DDR5로 생산을 돌리다 보니 LPDDR4, eMMC 같은 구형 메모리 공급이 빠르게 줄어든다. 그래서 퇴역한 줄 알았던 DDR3 가격까지 오르는 것이다.

DDR3가 오르는 데는 더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지금 천문학적인 투자는 전부 10nm 이하 미세공정에만 몰려 있다. DDR3 같은 구형 제품을 찍어내려면 그에 맞는 구형 노광기가 필요한데, 그런 라인 자체가 빠르게 줄었다. 만들고 싶어도 만들 라인이 없다. 단순히 안 만드는 게 아니라 못 만드는 쪽에 가깝다.

이 여파는 우리 일상까지 온다. 아이폰 같은 플래그십 스마트폰의 경우, 메모리 비용이 전체 부품 원가의 20% 이상을 차지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PC, 스마트폰 출하량 자체가 줄어들 거라는 전망도 있다.

'범용 메모리'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다. 메모리가 더 이상 '누가 만들어도 비슷한 범용 제품'이 아니게 됐다는 점이다. 특히 HBM은 고객사 요구에 맞춰 설계하는 맞춤형 반도체의 성격을 띤다. 엔비디아가 원하는 사양에 맞춰 만들어 주는 식이다.

그 결과 메모리 기업은 단순 '제조업'에서 '설계 기반 서비스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과거 치킨 게임이 가능했던 건 제품이 다 똑같아서 가격으로만 싸웠기 때문인데, 그 전제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쫓기는 도망자 — 지정학 리스크

과거의 치킨 게임이 순수한 '시장 점유율' 경쟁이었다면, 지금의 쇼티지에는 지정학적 공급망 리스크가 섞여 있다. 중국의 메모리 굴기가 무섭게 올라온다. 두 갈래다.

D램에서는 CXMT가 치고 올라온다. CXMT는 2026년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700% 급증하며 점유율 8%로 4위 공급업체에 올라섰다.

낸드에서는 YMTC가 더 공격적이다. YMTC는 우한 3공장 가동을 앞당겨 원래 2027년이던 양산 일정을 올해 말로 끌어왔다. 1·2공장이 이미 풀가동인 상황에서, 신규 공장이 다 돌면 생산 능력은 월 20만 장 수준에서 40만 장 이상으로 두 배가 된다. 외신은 YMTC가 올해 안에 출하량 기준으로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을 제치고 3위로 올라설 수 있다고 본다.

더 주목할 건 방식이다. 이번 신규 공장은 도입 장비의 절반 이상을 중국산으로 채웠다. 미국이 2022년 수출 규제로 ASML 같은 서방 장비를 막았는데, YMTC가 자국 식각 장비 업체(AMEC 등)로 그 빈자리를 메우며 '미국 장비 없이도 만들 수 있다'를 입증한 셈이다. 나아가 일부 라인으로 D램과 HBM 진입까지 노린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변수도 있다. YMTC는 여전히 미국 엔티티 리스트에 올라 있어 애플 같은 글로벌 고객과의 직접 거래에 제약이 있다. 기술과 물량을 확보해도 실제 팔 시장이 막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당장은 중국 내수 시장 만이 주 무대가 된다.

이 중국의 추격이 한국 기업을 더 빠르게 도망치게 만든다. CXMT와 YMTC가 범용 제품을 치고 올라오니, 삼성·SK하이닉스·마이크론은 중국이 따라오기 어려운 고부가 가치 라인(HBM, 첨단 DDR5, 고적층 낸드)으로 더 빠르게 옮겨간다. 이 '쫓기는 도망자' 전략이 범용 메모리 공급 부족을 한층 심화시킨다. 자발적 선택이자 동시에 떠밀린 선택이기도 하다.

전력 효율이 가격을 정당화한다

AI 데이터센터는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그래서 이제는 단순히 용량만 큰 메모리가 아니라, 전력을 덜 먹는 저전력 고성능 메모리(LPDDR5X 등)가 서버에서도 필수가 됐다. 데이터센터 운영비에서 전기료 비중이 크기 때문에, 비싸도 전력을 아끼는 메모리가 결국 이득이라는 논리다. 비싼 값이 정당화되는 셈이다.


3부. 두 시대를 나란히 놓고 보면

과거의 치킨 게임이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의 싸움이었다면, 현재의 램 쇼티지는 '누가 더 빨리 기술적 격차를 벌리느냐'의 싸움이다. 이제 메모리는 PC의 부속품이 아니라, AI라는 거대한 엔진을 돌리는 핵심 연료가 됐다.

구분 치킨 게임 시대 (~2008) 램 쇼티지 시대 (2025~)
가격 방향 폭락 폭등
수요 성격 PC 중심, 들쭉날쭉 AI 데이터센터 중심, 구조적 폭증
공급 태도 너도나도 무리한 증설 3사 모두 보수적 투자
경쟁 구도 다수 기업의 출혈 경쟁 살아남은 소수의 과점
결과 약한 기업 도태 살아남은 기업의 수익성 폭발

같은 메모리 산업인데 정반대 그림이 나온다. 차이를 만든 건 두 가지다.

하나는 수요의 성격이다. 과거 PC 수요는 경기에 따라 출렁였다. 지금 AI 수요는 단기 유행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커지는 흐름으로 평가된다. 공급이 20~25% 늘 때 수요가 60~70% 늘어난다면,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공급자의 태도다. 과거엔 경쟁자가 많아서 누군가는 항상 무리하게 증설했다. 지금은 세 회사만 남았고, 모두 치킨 게임의 고통을 겪어봤기에 함부로 공장을 늘리지 않는다. 과점 구조가 가격 안정, 정확히는 가격 상승을 떠받친다.


마무리 — 무엇을 봐야 하나

치킨 게임 시대의 교훈은 '공급은 쉽게 늘고 수요는 불안정하다'였다. 그래서 만들수록 망했다. 지금 램 쇼티지 시대의 조건은 정반대다. '수요는 구조적으로 폭증하는데 공급은 쉽게 못 늘린다.' 그래서 만들 수가 없어서 오른다.

다만 영원한 호황은 없다. 과거에도 모두가 좋다고 할 때 공장을 늘렸다가 공급 과잉을 맞았다. 지금 메모리 3사도 설비 투자를 늘리는 중이고, 2026년 D램 생산량은 전년 대비 24% 늘 것으로 전망된다. 이 공급이 실제 시장에 풀리는 시점, 그리고 AI 투자 열기가 식는 시점이 다음 사이클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건 두 가지다. 수요가 정말 구조적인지, 그리고 공급이 언제, 얼마나 풀리는지. 이 두 레이어가 만나는 지점에서 다음 가격 방향이 결정된다.

투자자라면 한 가지를 더 기억해야 한다. 반도체 사이클은 늘 같은 방식으로 돈다. '공급 부족'을 신호탄으로 투자가 시작되고, 그 투자가 다시 '공급 과잉'을 부르며 마감된다. 지금 메모리 3사가 늘리는 설비 투자(CAPEX)는 2~3년 뒤 실제 물량으로 시장에 풀린다. 여기에 변수가 하나 더 있다. 중국이다. YMTC의 우한 신규 공장이 올해 말부터 본격 가동되면 적지 않은 낸드 물량이 시장에 더해진다. 3사의 증설 물량과 중국의 신규 물량이 겹치는 시점이 곧 다음 하강 사이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엔 사이클이 안 돌 수도 있다

하지만 정반대 시각도 있다. 위 논리는 '공급이 따라잡으면 가격이 떨어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 전제의 핵심은 결국 수요가 어느 순간 멈춘다는 가정이다. 그런데 이 가정이 틀렸다면 어떻게 될까.

앤트로픽의 CEO 다리오 아모데이는 최근 글에서 AI 발전 속도를 두고 강한 주장을 내놓았다. 컴퓨팅 파워가 커질수록 AI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스케일링 법칙'이 10년 넘게 들어맞아 왔고, 이게 1~2년만 더 이어지면 '데이터센터 안의 천재들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정학적으로도 AI가 한 나라의 군사·경제 권력을 좌우하는 지배적 원천이 될 거라 본다. AI를 가진 나라와 3년 뒤처진 나라의 격차를, 2차대전 해병대와 중세 검사의 싸움에 비유할 정도다.

이 주장이 맞다면 AI 인프라 수요는 단순한 IT 유행이 아니다. 국가와 빅테크가 멈출 수 없는 '군비 경쟁'에 가깝다. 뒤처지면 끝이라고 믿는 한, 누구도 투자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메모리 수요는 3사 CAPEX와 YMTC 물량이 다 풀려도 그 이상으로 계속 앞서 나갈 수 있다. 전통적인 '공급 과잉 → 가격 폭락' 사이클이 이번엔 한참 미뤄지거나, 와도 약하게 올 수 있다는 뜻이다. 호황이 3년보다 훨씬 길어질 수 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한쪽 시각이다. 그것도 AI를 파는 쪽 CEO의 강한 전망이라 그대로 믿을 일은 아니다. 스케일링 법칙이 언젠가 한계에 부딪힐 수 있고, AI 투자 열기가 기대만큼의 수익을 못 내면 한순간에 식을 수도 있다. 거품이라는 경고도 만만치 않다.

결국 메모리의 운명은 두 시나리오 중 어느 쪽이 맞느냐에 달려 있다. 'AI도 결국 평범한 기술 사이클을 탄다'는 쪽이면 2~3년 뒤 공급 과잉이 온다. 'AI는 국가 전략급 패러다임 전환이다'는 쪽이면 수요가 공급을 한참 더 앞질러 호황이 길어진다. 치킨 게임의 역사가 알려주는 건, 시장은 늘 한쪽으로 너무 멀리 갔다가 반대로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번엔 그 '한쪽'이 과거보다 훨씬 멀고 길지도 모른다. 지금 봐야 할 단 하나의 지표를 꼽으라면, AI 수요가 진짜로 멈추지 않는지,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