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 시리즈의 악당, 괴물, 노인 역할들을 맡은 배우들의 실제 필모그래피를 보면 꽤 놀랍다.
영화에서 흉측하거나 악랄하게 나온 배우들이 다른 작품에서는 미남, 미녀 또는 청년 영웅으로 활약한 이력이 있다.
벨라트릭스 레스트레인지 = 헬레나 본햄 카터
볼드모트의 가장 광적인 추종자. 헝클어진 머리, 검게 썩은 치아, 광기 어린 눈빛. 아즈카반 탈옥수라는 설정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외모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배우의 첫 주연작이 **전망 좋은 방(A Room with a View, 1985)**이다. E.M. 포스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국 로맨스 영화로, 헬레나는 에드워디안 시대의 순수하고 단정한 영국 귀족 아가씨 루시 허니처치를 연기했다. 당시 열아홉 살. 초반 필모그래피 내내 "영국 장미(English Rose)"라고 불리며 청순한 역할에만 캐스팅됐다. 훗날 팀 버튼 감독과의 작업을 거치며 기괴하고 어두운 캐릭터 전문 배우로 완전히 노선을 바꿨다. 킹스 스피치(2010)에서는 엘리자베스 왕비 역으로 BAFTA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헬레나 때문이다. 앗.. 이 사람이 '전망 좋은 방'에서 천사처럼 나왔던 여주라니.. ㅠㅠ

전망 좋은 방에는 매기 스미스(호그와트의 맥고나걸), 다니엘 데이루이스, 주디 덴치가 함께 출연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uZLwtrrCJfE
볼드모트 = 랄프 파인즈
코도, 머리카락도 없고 눈동자마저 찢어진 어둠의 마왕. 해리 포터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악역 분장이다. 분장팀이 코를 디지털로 제거하고 피부를 창백하게 처리했다.

이 배우의 다른 대표작은 **잉글리쉬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 1996)**다. 사막에서 불에 타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한 알마시 백작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부상 전 장면에서는 분명한 미남이다. 쉰들러 리스트(1993)에서는 냉혹한 나치 장교 아몬 괴트를 연기해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BAFTA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아카데미는 톰 리 존스(도망자)에게 패했는데, 지금까지도 그 해 아카데미 최대의 이변 중 하나로 꼽힌다. 볼드모트와 알마시는 양극단에 있는 캐릭터인데 둘 다 랄프 파인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WgOjuLg5oY
길데로이 록하트 = 케네스 브래너
2편 비밀의 방의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허풍쟁이 마법사로, 실력은 없고 외모와 명성에만 집착하는 캐릭터다. 과장된 웃음, 번질번질한 금발, 과한 자기 홍보가 트레이드마크다.

케네스 브래너는 해리 포터 출연 이전부터 영국 연극계와 영화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스물셋에 왕립 셰익스피어 컴퍼니(RSC)에 합류해 역대 최연소로 헨리 5세를 연기했고, 1989년 자신이 감독·주연한 영화 **헨리 5세(Henry V)**로 아카데미 감독상·남우주연상 동시 후보에 올랐다. 1993년 **말괄량이 길들이기(Much Ado About Nothing)**에서는 덴젤 워싱턴, 엠마 톰슨과 함께 청년 베네딕트 역을 맡아 로맨틱한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1996년에는 햄릿을 4시간짜리 전막 영화로 직접 연출하고 주연도 맡았다. 허풍쟁이 록하트와는 거리가 멀다.

참고로 케네스 브래너는 헬레나 본햄 카터와 한때 연인 관계였다. 두 사람 모두 해리 포터에 출연했지만 극 중 공유하는 장면은 없다.
알버스 덤블도어 (3~8편) = 마이클 갬본
흰 수염의 연로한 교장.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가장 나이 들고 위엄 있는 외모로 등장하는 캐릭터다.

젊은 시절 마이클 갬본은 꽤 달랐다. 1970년대 초 BBC 역사 드라마 시리즈 **보더러스(The Borderers)**에서 스워시버클링 스타일의 청년 기사 개빈 커를 연기했고, 당시 외모가 눈에 띄어 제임스 본드 프로듀서 쿠비 브로컬리에게 007 제임스 본드 오디션 제안까지 받았다. 조지 레이즌비 후임 본드 후보 중 한 명이었다는 이야기다. 결국 숀 코너리가 복귀하면서 흐지부지됐지만, 젊은 갬본이 본드 후보에 오를 만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이후 투박한 외모로 성격파 배우의 길을 걸었고, BBC 드라마 **싱잉 디텍티브(The Singing Detective, 1986)**로 BAFTA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시리우스 블랙 = 게리 올드먼
12년을 아즈카반에서 보낸 탈옥수. 3편 첫 등장 시 장기 수감으로 몰골이 초라하고 수척한 모습이다. 죽음을 먹는 자들의 살인마라는 오해까지 겹쳐 강렬한 악인 인상을 준다.

게리 올드먼 커리어 초반은 완전히 달랐다. 1987년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프릭 업 유어 이어스(Prick Up Your Ears)**에서 60년대 영국의 매력적인 젊은 극작가 조 오튼을 연기했다. 비평가 로저 에버트는 "영국 최고의 젊은 배우"라고 평했고, 비평 매체 사이트 앤드 사운드는 "올드먼은 오튼의 발랄한 미모까지 공유한다"고 썼다. 1992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Dracula)**에서는 타이틀 롤을 맡아 젊은 백작으로 등장하는 오프닝 장면에서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그러다 뤽 베송 감독의 **레옹(Léon: The Professional, 1994)**에서 마약 수사관 스탠스필드를 연기하며 역대급 악역 반열에 올랐다. 마약에 절어 발작하듯 움직이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학살을 벌이는 그 장면 — "베토벤을 좋아하나?"라고 묻던 그 목소리.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는 부패 공권력의 화신이다. 레옹에서 어린 마틸다 가족을 몰살시킨 그 배우가, 해리 포터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12년을 버틴 뒤 해리를 지키려는 편에 선다. 같은 얼굴이 맞나 싶은 전환이다.

세드릭 디고리 = 로버트 패틴슨
4편 불의 잔에 등장하는 후플푸프 기숙사의 삼마법사 대회 호그와트 대표. 이 역할 자체는 미남으로 나오긴 한다.

패틴슨은 세드릭 이후 **트와일라잇(2008)**의 뱀파이어 에드워드 컬렌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여기서도 미남이다. 그러나 이후 커리어 방향이 흥미롭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코스모폴리스(2012),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흑백영화 더 라이트하우스(2019), 그리고 **더 배트맨(2022)**의 브루스 웨인까지 이어지며 미남 이미지를 철저히 해체하는 방향으로 갔다. 세드릭 디고리만 보고 훗날 배트맨이 될 배우라고 예상하기는 어렵다.

https://www.youtube.com/watch?v=Rhbs0Qs_zug
세베루스 스네이프 = 알란 릭맨
기름진 검은 머리, 냉혹한 눈빛, 항상 검은 로브. 1편부터 해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마법약 교수다. 8편에 걸쳐 쌓아온 적대감이 마지막에 완전히 뒤집히는, 시리즈 전체에서 가장 복잡한 인물이기도 하다.

알란 릭맨은 이미 BBC 드라마와 영국 연극계에서 베테랑으로 활동하던 배우였다. 그런 그의 영화 첫 주연이 **다이 하드(Die Hard, 1988)**의 한스 그루버다. 지적이고 섹시한 테러리스트로, 스크린 등장과 동시에 전 세계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런가 하면 **센스 앤 센서빌리티(Sense and Sensibility, 1995)**에서는 일편단심으로 사랑을 바치는 신사 브랜든 대령을 연기했다. 스네이프의 냉혹하고 거친 겉모습과는 정반대로, 다정하고 절제된 영국 신사의 정석이었다. 러브 액츄얼리(2003)에서 바람피우는 남편 역도 같은 배우다. J.K. 롤링이 직접 스네이프 역으로 지목했고, 릭맨은 롤링에게서 스네이프의 결말을 미리 전해들은 뒤 시리즈 내내 그 비밀을 혼자 지니고 연기했다. 2016년 별세했다.

리무스 루핀 = 데이비드 듈리스
낡은 옷을 입고 항상 피곤해 보이는 어둠의 마법 방어술 교수. 인자하고 따뜻한 인상이지만 늑대인간이라는 정체가 숨어있다.

이 배우의 젊은 시절 필모그래피는 루핀의 선한 이미지와 거리가 있다. 마이크 리 감독의 **네이키드(Naked, 1993)**에서 철학적이면서도 파괴적인 청년 조니를 연기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날카롭고 반항적인 에너지가 넘치는 역할이었다. 훗날 DC 영화 **원더 우먼(2017)**에서는 루핀의 선한 이미지만 기억하는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 — 메인 빌런인 전쟁의 신 아레스로 등장해 압도적인 위압감을 발휘한다. 루핀 교수가 전쟁의 신이었다.

피터 페티그루 = 티모시 스폴
쥐를 닮은 외모, 비굴한 표정. 볼드모트의 앞잡이이자 해리 부모를 배신한 인물로,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캐릭터 중 하나다.

분장을 벗은 티모시 스폴은 영국이 사랑하는 대배우다. 마이크 리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리며, **터너(Mr. Turner, 2014)**에서 영국의 천재 화가 J.M.W. 터너를 연기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페티그루의 지저분하고 비겁한 인상과 달리, 중후하고 예술가적인 기질이 넘치는 연기를 펼쳤다. 해리 포터와 터너를 나란히 놓으면 같은 배우라고 믿기 어렵다.

미네르바 맥고나걸 = 매기 스미스
뾰족한 마녀 모자에 엄격한 교사. 호그와트 부교장으로 시리즈 전편에 걸쳐 등장하는 기숙사 담임이다.

매기 스미스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맥고나걸 교수의 이미지와 상당히 다르다. 단정하고 클래식한 미인으로, 1969년 **미스 진 브로디의 전성기(The Prime of Miss Jean Brodie)**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당시의 모습은 엄격한 마녀 교수 뒤에 가려진 또 다른 얼굴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캐릭터 진 브로디 역시 독특한 신념을 가진 교사였다. 전망 좋은 방(1985)에서 헬레나 본햄 카터의 보호자 역할로도 등장한다 — 해리 포터 시리즈 배우들이 그 영화에서 다시 만나는 셈이다. 2024년 별세했다.

루시우스 말포이 = 제이슨 아이작스
드레이코의 아버지. 백발에 지팡이 속에 또 지팡이를 숨긴 순수혈통 마법사 귀족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가장 비열하고 냉소적인 악역 중 하나다.

그런데 같은 해인 2003년, 제이슨 아이작스는 **피터 팬(Peter Pan, 2003)**에서 후크 선장을 연기했다. 아이들 영화의 악당이지만 이 작품에서의 후크 선장은 기존과 달리 섹시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으로 재해석됐다. 루시우스 말포이와 후크 선장을 같은 해에 소화한 셈이다. 블랙 호크 다운(2001)의 냉정한 미군 특수부대원, 패트리어트(2000)의 잔인한 영국군 대령 등 강한 인상의 역할이 많지만, 실제 인터뷰나 최근 작품에서는 유머러스하고 젠틀한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분장과 의상을 벗으면 루시우스 말포이와는 상당히 다른 얼굴이다.

영국 연기 씬의 중량급 배우들을 줄줄이 데려다가 괴물, 악당, 노인으로 변신시켰다는 것이다. 분장 밑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보다가 나중에 알면 두 번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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