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가 스크린에서 숨긴 것들/반지의 제왕

반지의 제왕 - 하라드림과 동부인 — 사우론 편에 선 인간들의 사정

by 한량. 2026. 3. 6.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의 군대는 오크와 트롤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인간도 있다. 그것도 꽤 많다. 영화에서 코끼리처럼 생긴 거대한 짐승 '무마킬'을 타고 등장하는 하라드림, 그리고 동쪽에서 몰려오는 동부인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왜 사우론의 편에 섰을까.


하라드림은 어디서 왔나

하라드림은 중간계의 남쪽, '하라드'라 불리는 광대한 지역에 사는 인간들이다. 하라드는 곤도르 남쪽 국경 너머로 펼쳐지는 땅으로, 사막과 초원, 밀림이 섞인 지역이다. 단일한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여러 부족과 씨족으로 이루어진 집합체다.

크게는 '근 하라드(Near Harad)'와 '원 하라드(Far Harad)'로 나뉜다. 곤도르와 국경을 접하는 근 하라드는 상대적으로 익숙한 지역이고, 그 너머 깊숙이 펼쳐지는 원 하라드는 훨씬 이질적인 문화권이다. 원작 소설에 따르면 펠레노르 평원 전투에 참여한 하라드 군대 중에는 '반-트롤(Half-troll)'이라 불릴 만큼 거구인 원 하라드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라드림이라는 이름 하나 아래 실제로는 매우 다른 집단들이 묶여 있는 셈이다.

영화 '두 개의 탑'과 '왕의 귀환'에서 이들은 대규모 전쟁코끼리인 무마킬을 앞세우고 펠레노르 평원에 등장한다. 영화 속 모습만 보면 전형적인 '악의 군대' 구성원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동부인은 어디서 왔나

동부인은 중간계 동쪽의 광활한 땅, '론'과 그 너머 지역에 사는 인간들이다. 하라드림과 마찬가지로 단일 민족이 아니라 여러 집단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사실 동부인과 어둠의 세력의 관계는 사우론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시대, 사우론의 스승이었던 모르고스 시절부터 일부 동부인들은 이미 어둠의 편에 서 있었다. 울팡을 비롯한 동부인 전사들이 요정 연합군을 배신하고 어둠 편으로 돌아선 사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배경이 있었기에 제2시대의 사우론은 새로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닦여진 기반 위에서 동부인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제2시대에 사우론은 '선물을 주는 자'라는 이름으로 동쪽 인간들에게 접근했고, 힘과 자원을 제공하면서 영향력을 넓혔다. 제3시대에 이르면 동부인 상당수는 사우론의 명령 아래 움직이는 세력이 되어 있다.


누메노르인의 역사와 억압

하라드림이 곤도르를 적으로 여기게 된 데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제2시대, 누메노르인들은 중간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들은 뛰어난 기술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간계 남부와 동부의 원주민들을 지배하거나 착취했다. 누메노르의 왕들 중 일부, 특히 후기 왕들은 원주민을 노동력으로 동원하고 자원을 수탈했다. 이 기억은 오래 남았다.

누메노르가 멸망한 뒤 세워진 곤도르는 누메노르인의 후손 국가다. 하라드림 입장에서 곤도르는 자신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세력의 계승자다. 곤도르와의 국경 분쟁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집단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검은 누메노르인'이다. 누메노르 타락기에 사우론을 숭배하던 누메노르인 일부가 하라드 지역에 정착해 지배층이 되었다. 헤루모르, 암바루소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하라드 원주민들 위에 군림하면서, 곤도르에 대한 적개심을 조직적으로 심어놓았다. 단순한 역사적 원한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과 연결된 지배층이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낸 구조적 반감이다.

사우론이 곤도르의 적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하라드림에게 사우론은 적의 적, 즉 동맹 가능한 존재가 된다.


선택인가, 강요인가

이들이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사우론 편에 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작 소설에서 톨킨은 이 문제를 직접 건드린다. 펠레노르 전투가 끝난 뒤, 샘와이즈는 죽어 있는 하라드림 병사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 사람도 고향이 있고, 가족이 있고, 집이 있을 텐데, 왜 여기까지 와서 싸웠을까. 속아서 왔을까, 아니면 강요당한 걸까. (물론 시간 제약 상, 영화에는 이런 세세한 설명이 없다)

톨킨은 이 장면을 통해 전쟁에서 적으로 등장하는 인간들도 나름의 삶과 사연이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들 모두가 열렬한 사우론 지지자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간계의 권력 구조를 보면, 사우론은 단순한 설득이 아니라 공포와 강압으로도 세력을 확장했다. 사우론의 영향권 아래 있는 부족장이나 군주가 병력을 동원하면, 일반 병사들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전쟁 속에서의 역할

펠레노르 평원 전투에서 하라드림의 무마킬 부대는 로한 기병대에 큰 위협이 된다. 말들이 무마킬 앞에서 공포로 멈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레골라스가 무마킬 위로 올라가 처리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 전투에서 이 거대한 짐승들은 상당한 전력이다.

반지의 제왕 - 발에 자석이 달린 레골라스

 

반지의 제왕 - 발에 자석이 달린 레골라스

 

동부인은 모르도르 본진에서 사우론의 주력 병력과 함께 움직인다. 반지원정대가 사우론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검은 문 앞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 이 동부인 병력도 그곳에 있다.


전쟁 이후

반지가 파괴되고 사우론이 소멸하자, 이들은 전투를 멈추고 항복하거나 퇴각한다. 아라곤은 이들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 원작에서 아라곤은 왕위에 오른 뒤 하라드와 동부 지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오랜 갈등을 정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다. 아라곤의 치세에서 이 지역들은 더 이상 영원한 적이 아니다. 전쟁은 끝났고, 사우론이라는 외부 압력이 사라지면서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게 된다.


힘의 반지 드라마 속 남부인

아마존 드라마 '힘의 반지'는 제2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남부인들이 어떻게 어둠의 편으로 흘러가게 되는지 그 과정을 직접 보여준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부인들은 '사우스랜드'라는 지역에 사는 평범한 마을 주민들이다.

 

훗날 모르도르가 되는 땅 근처에 살고 있으며, 브론윈, 테오 등 등장인물들은 모두 원작 소설에는 없는 드라마 오리지널 캐릭터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하라드림과 직접 같은 집단은 아니지만, 사우론에게 끌려가는 남부 인간들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맥락이 이어진다.

힘의 반지 - 브론윈
힘의 반지 - 테오

드라마 시즌 1에서 이 남부인 마을은 아다르가 이끄는 오크 군단의 침략을 받는다. 주민들은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굴복하거나 세 갈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선택지가 없는 상태에서 강압에 의해 어둠의 편으로 끌려가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시즌 1의 핵심 축 중 하나다.

이 서사가 블로그 본문에서 다룬 "선택인가, 강요인가" 문제를 훨씬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원작 소설은 전쟁이 끝난 뒤 죽어 있는 하라드림 병사를 바라보는 샘의 시선으로 이 질문을 던지지만, 드라마는 그 답이 되는 과정 자체를 시각화한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어둠의 역사 속으로 편입되어가는 장면들이 그것이다.

다만 주의할 점이 있다. 드라마 남부인들은 원작에 없는 오리지널 설정이고, 드라마 자체가 원작 설정과 충돌하는 부분이 여럿 있다. 드라마는 이 주제를 대중적으로 풀어낸 하나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정리하면

하라드림과 동부인이 사우론 편에 선 이유는 하나가 아니다.

첫째, 역사적 원한이 있다. 누메노르인과 곤도르에 대한 누적된 반감이 사우론과의 동맹을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둘째, 강압과 유인이 있었다. 사우론은 힘과 자원을 제공하며 지역 지배자들을 끌어들였고, 이 결정에 따라 일반 병사들도 전장에 나왔다.

셋째, 정보의 한계다. 중간계 외진 지역에 사는 이들에게 사우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반지가 무엇인지, 이 전쟁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방법이 없었다.

톨킨의 이야기에서 하라드림과 동부인은 단순한 악의 군대 구성원이 아니다. 역사와 구조의 산물로서 전장에 서게 된 인간들이다. 선악의 구도가 뚜렷한 것처럼 보이는 반지의 제왕 안에서, 이들의 존재는 그 구도가 실제로는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