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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앤트로픽 최신 AI를 막았다 — 다시 불붙은 '소버린 AI' 논쟁

by blade 2026. 6. 17.

미국이 앤트로픽 최신 AI를 막았다 — 다시 불붙은 '소버린 AI' 논쟁

무슨 일이 일어났나

2026년 6월 12일, 미국 정부가 앤트로픽의 최신 AI 모델 '미토스 5(Mythos 5)''페이블 5(Fable 5)'에 대해 해외 접근 제한 조치를 내렸다. 쉽게 말해 일종의 수출 통제다.

특이한 점은 적용 범위가 넓다는 것이다. 해외에 있는 이용자뿐 아니라 미국 안에 사는 외국 국적자, 심지어 앤트로픽에서 일하는 외국인 직원까지 대상에 포함됐다. 문제는 외국인과 내국인을 실시간으로 구분하는 게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앤트로픽은 일단 전 세계 모든 이용자를 대상으로 두 모델 서비스를 임시 중단했다.

조치의 명분은 보안이다. 해당 모델이 프롬프트 통제를 우회하는 이른바 '탈옥(jailbreak)'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서 나왔다. 앤트로픽은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입장을 냈지만, 지침을 지키기 위해 우선 접속을 막았다.

왜 한국이 신경 쓰는가

한국 기업과 기관도 직접 영향권에 들어갔다. 핵심은 '프로젝트 글래스윙(Glasswing)'이다.

글래스윙은 앤트로픽이 사이버보안에 특화된 미토스 계열 모델을 검증된 기업·기관에 먼저 제공하는 협력 프로그램이다. 악의적 해커가 악용하기 전에, 믿을 만한 곳들이 소프트웨어 취약점에 먼저 대응하도록 돕자는 취지다.

앤트로픽은 6월 2일 이 프로그램 참여 대상을 15개국 약 150개 기관으로 넓혔다. 이때 국내에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SK텔레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등이 새로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번에 막힌 미토스 5가 글래스윙 참여 기관들이 쓰던 '미토스 프리뷰'의 후속 모델이라는 점이다. 프리뷰를 쓰던 기관들이 다음 버전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길이 막힌 셈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도 KISA의 참여와 모델 접근권 확보 사실을 확인한 바 있어, 정부 차원의 대응도 시작됐다.

단순한 연구 중단이 아니다. 글래스윙은 사이버보안에 특화된 협력체인 만큼, 차세대 반도체 공정 설계나 통신망 보안 취약점 점검 같은 'AI 기반 사이버 방어 체계 구축' 일정이 함께 밀릴 수 있다. 외산 모델로 방어선을 짜던 기관일수록 타격이 직접적이라는 뜻이다.

핵심 메시지: "남의 AI에 기대면 위험하다"

이번 사건이 보여준 건 단순하다. 국제 협력 프로그램에 들어가 모델 접근권을 받아도, 그 나라 정부의 정책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못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 활용과 사업 전략이 해외 기업·정부의 정책 변수에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새삼 주목받는 단어가 소버린 AI(Sovereign AI)다. 자국이 직접 개발하고, 운영하고, 통제할 수 있는 AI 역량을 말한다.

전 세계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이 사건에 대한 반응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 캐나다: 마크 카니 총리는 "특정 모델에 지나치게 의존할 때 닥칠 수 있는 위험을 보여준다"고 했다. 중앙은행 총재 출신답게 2008년 금융위기 때 은행 간 연쇄 부실에 빗대며, 소수 독점 모델에 기대는 위험을 경고했다.
  • 유럽: 프랑스 총리를 지낸 에두아르 필리프 르아브르 시장은 미국의 조치를 비판했고, 영국의 톰 터겐핫 하원의원(전 안보장관)은 "이제 국가의 주권은 대포가 아니라 코드에 달려 있다"고 했다.
  • 영국 산업계: 통신사 BT, 금융그룹 HSBC, 방산기업 BAE시스템즈 등이 현지 스타트업과 손잡고 미국 통제를 받지 않는 초거대 AI 모델 구축에 나섰다.
  • 인도: 연간 50억 달러(약 7조 5천억 원) 규모의 '소버린 AI 펀드'를 만들자는 목소리가 나온다.

참고로 G7 정상회의 기간인 6월 17일에는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 실리콘밸리 경영진과 G7 정상 간 오찬이 예정돼 있다. 이번 수출 제한으로 불거진 'AI 공급망 불안'과 의존성 분산 대책이 논의될 전망이다.

한국 전문가들의 진단

국내 전문가들은 결이 조금씩 다르다.

최기영 전 과기정통부 장관은 AI가 사이버 공격과 방어 양쪽에 다 쓰일 수 있는 자산이라, 한 국가가 독점하면 다른 국가엔 큰 위협이 된다고 봤다. 그래서 한국도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했다. 다만 인재, GPU, 데이터센터, 투자 등 자원이 부족한 한국으로서는 쉽지 않으니 산·학·연·관(산업계·학계·연구소·정부)이 더 협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남국 울산의대 교수는 다른 각도로 봤다. 이번 조치가 역설적으로 미국 중심 AI 생태계를 약화시키는 부메랑이 될 거라는 전망이다. 미국·중국 양극 체제를 넘어, 소외된 국가들이 결집하는 '3극 체제'로 재편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이 원천기술 구축만 고집하지 말고, 응용기술 관점에서 성능 좋은 AI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상엽 카이스트 특훈교수는 가장 현실적인 노선을 제시했다. 모든 영역에서 미국 수준의 초거대 모델을 따라잡기보다, 국방·의료·연구·행정 같은 핵심 분야에서 해외 접속 없이도 작동하는 AI를 먼저 확보하자는 것이다. 자원이 무한하지 않으니, 통제가 들어와도 꼭 필요한 모델은 돌아가게 만들어 두자는 논리다.

진짜 쟁점은 '인프라 통제권'

소버린 AI 하면 보통 '모델'을 떠올리지만, 더 깊은 레이어에는 인프라 문제가 있다.

한국HPE의 김태룡 이사는 "GPU 보유량만으로 AI 성능이 결정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진단했다. 앞으로는 CPU, 스토리지, 네트워크, 데이터 파이프라인, 운영 플랫폼까지 전체 AI 인프라 스택의 균형이 중요해진다는 것이다.

핵심 개념은 두 가지다.

  1. 소버린 바이 디자인(Sovereign by Design): 기존엔 클라우드 위에 보안 정책을 덧씌우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설계 단계부터 데이터 주권과 통제 기능을 인프라에 내장하는 방향으로 간다.
  2. AI 팩토리: 인프라, 소프트웨어, 데이터 파이프라인, 운영 체계를 하나로 통합해, 실험 단계에 머물지 않고 실제 운영까지 빠르게 넘어가도록 하는 구조다.

국내에서도 사례가 나온다. DB생명은 외부와 망을 분리한 '에어갭' 환경에서 생성형 AI 챗봇과 LLM 운영 플랫폼을 구축했다. 국가 차원에서는 올해 완성될 KISTI 슈퍼컴퓨터 6호기 '한강'이 대규모 AI 워크로드를 처리할 핵심 플랫폼으로 꼽힌다.

그런데 정부 돈으로 키우는 게 답일까

여기서 짚어볼 논쟁이 하나 있다. 업스테이지 김성훈 대표는 6월 16일 기자간담회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지 않으려면 큰 새우가 되면 된다"며, 한국 독자 AI를 키우려면 지금보다 10배 이상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위기 진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처방을 두고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다. 정리하면 이런 빈틈이 지적된다.

  • 이미 받은 지원도 상당하다. 업스테이지 누적 투자금은 약 4,000억 원이다. 2026년 4월 시리즈C 1차로 기업가치 1조 원을 인정받아 국내 생성형 AI 기업 중 처음으로 유니콘에 올랐고, 정부 독자 모델 사업 5개 정예팀에도 들어가 있다. 이 사업에 투입되는 정부 예산은 2,136억 원, GPU 지원만 별도로 4,500억 원 안팎이다. 이미 민간·정부 양쪽에서 대규모 자금을 받은 대표 수혜 기업이라는 뜻이다.
  • 예산이 5팀으로 분산된다. 네이버클라우드, SK텔레콤, NC AI, LG AI연구원까지 5개 팀이 비슷한 범용 파운데이션 모델을 동시에 개발하는 구조다. '선택과 집중' 없이 골고루 뿌리는 방식이 세계 3위 AI 강국 목표에 맞는지 의문이 나온다.
  • 벤치마크 숫자는 거리를 두고 봐야 한다. 업스테이지는 솔라 오픈2 프리뷰가 인텔리전스 지수 44.4점으로 클로드 소넷 4.6, GPT-5 수준이라 했고, 에이전트 역량(타우2-벤치)에서 98%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런 수치는 모델 제작사가 직접 공개한 자료라, 실제 업무 현장의 안정성·비용 효율을 그대로 보장하진 않는다.
  • GPU 주권의 모순. 소버린 AI의 명분은 해외 기술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다. 그런데 모델을 학습시킬 고성능 GPU는 사실상 엔비디아라는 미국 기업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모델 가중치를 국내에 두고 데이터를 국내에서 처리해도, 연산 자원의 목줄을 해외가 쥐고 있다면 완전한 주권이라 부르긴 어렵다. 그래서 한국이 찾는 돌파구가 '풀스택(Full-Stack) 자립'이다. 리벨리온, 퓨리오사AI 같은 국산 AI 반도체(NPU)를 네이버클라우드·KT클라우드 같은 토종 인프라에 얹어 '엔비디아 없는 AI 생태계'를 만드는 시도가 소버린 인프라의 진짜 전장이다.

그래서 한국은 만들 수 있나

결론부터 말하면 "되긴 된다. 단 '독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이 갈린다."

일단 결과물은 나왔다. 정부 독파모 사업의 5개 정예팀이 1년간 경쟁해서 다 돌아가는 모델을 냈고, 5개 팀 모델 전부가 미국 비영리 연구기관 Epoch AI의 '주목할 만한 AI 모델'에 등재됐다. 빈손은 아니다. LG AI연구원의 K-엑사원은 매개변수 2,360억 개(236B) 규모이고, SKT의 A.X K1은 오픈소스 최고 수준인 딥시크 계열을 한국어 영역에서 앞섰다. 한국어·특정 도메인에선 확실히 경쟁력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핵심이다. '독자'라는 단어에 함정이 있다. 1차 평가에서 일부 팀이 탈락하며 '가중치 의존 논란'이 불거졌다. 진짜 밑바닥부터(from-scratch) 학습한 게 아니라, 외국산 오픈웨이트 모델 위에 한국어를 얹은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사실이라면 그건 독자 개발이 아니라 '남의 두뇌에 한국어 통역을 붙인 것'에 가깝다. 칩도 남의 것, 베이스 모델도 남의 것이면 뭐가 주권이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게 단순한 자존심 문제가 아닌 이유가 있다. 메타 같은 외국 기업이 오픈소스 라이선스 조건을 바꾸거나 소송을 걸면, 그 위에 쌓아 올린 한국형 서비스 전체가 법적·기술적으로 멈출 수 있다. 남이 지은 건물에 인테리어만 새로 하고 '내 집'이라 부르는 구조로는 정책이 끊겼을 때의 보험이 되지 못한다.

체급도 냉정하게 봐야 한다. 236B가 '프런티어급'이라 홍보되지만, 진짜 최상위(딥시크 V3가 671B, GPT·클로드는 파라미터를 공개하지 않지만 더 큰 체급으로 알려져 있다)와 비교하면 한 단계 아래다. 범용 추론·코딩 최상위권에선 격차가 남아 있다.

희망 사항 vs 현실

논의를 정리하면, 말로 외치는 것과 실제 상황 사이에 거리가 있다.

희망 사항 현실
소외된 나라들이 뭉쳐 '3극 체제'를 만든다 뭉칠 후보들은 GPU·자본·인재가 다 부족하고 이해관계도 달라 한 덩어리가 안 된다. 실제는 '미·중 2극 + 흩어진 중간지대'다
5개 팀 밀어주면 'AI 3강'이 된다 모델은 다 냈지만 일부는 가중치 의존 논란으로 탈락했고, 체급도 최상위보다 한 단계 아래다
우리 손으로 프런티어 모델을 만든다 맨바닥부터 GPT·클로드급을 뽑을 인재·데이터·연산이 부족하다. 증명된 건 한국어·특화 영역이다
정부가 10배 지원하면 '큰 새우'가 된다 GPU도 베이스 모델도 외산이면 돈을 부어도 주권은 남의 손에 있다. 통제가 조여지면 그 돈줄이 먼저 막힌다

물론 소버린 AI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국어·한국 문화에 특화된 모델은 국내 시장과 디지털 무역적자 완화에 분명한 가치가 있다. 특히 국방·안보 영역에서는 우리만의 모델이 협상 카드이자 최후의 보루가 된다. 핵심 질문은 이거다. 정부 지원이 끊겨도 시장에서 홀로 설 수 있는가.

정리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한국이 미국·중국을 따라잡을 수 있나"는 잘못된 질문이다. 못 따라잡는다. 맞는 질문은 "미국이 빗장을 걸어도 국방·의료·연구·행정이 멈추지 않을 최소한의 자생 모델을 갖췄나"다. 이건 충분히 가능하고, 이미 절반은 와 있다.

세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1. 소버린 AI는 '극'이 아니라 '보험'이다. 미·중과 맞서는 제3의 극을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라, 의존하던 외산이 끊겼을 때 핵심 기능을 굴릴 최후의 보루를 두는 거다. 이번 미토스·페이블 차단이 보여준 게 정확히 그거다.
  2. 진짜 주권은 모델이 아니라 인프라에 걸려 있다. 모델 가중치를 국내에 둬도 GPU 목줄을 엔비디아가 쥐고 있으면 반쪽짜리다. 모델 국산화와 하드웨어 자립에 같은 무게로 투자해야 한다.
  3. '나눠먹기'보다 '선택과 집중'이다. 5팀에 예산을 골고루 뿌리는 것보다, from-scratch 능력이 있는 한두 팀에 집중하는 게 한정된 자원을 쓰는 합리적 방법이다.

한마디로 'AI 3강'은 구호고, '안 끊기는 보험'이 현실적 목표다. 그 보험을 누가, 어디까지, 얼마에 드느냐가 앞으로 몇 년의 진짜 싸움이다.